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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ROLE DE LA FRANCE EN COREE
한국 외교정책과 프랑스 : 양국이해관계와 접근에 관한 연구 (1866~1907)

LE ROLE DE LA FRANCE EN COREE

조선문호개방을 앞 두고 국내 정치권의 움직임과 열강대국의 압력을 당한 대원군은 청국이 조선을 방패로 삼고, 종주권을 주장한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청국의 전략에 어긋나는 노선을 취하면 아들인 고종이 즉위할 때 청국의 승인을 받기 어려운 입지에 서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대원군이 조선의 부국강병을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대원군은 아들을 앞세우고서도 절대정권을 쉽게 유지하지 못 한 입장이었기에 서튼 문호개방을 선포하면 쿠데타의 위험성에 노출될수 있기에, 열강대국에게 외교적으로 행동했다. 대원군은 진무사를 시켜 1871년 봄 강화도 앞 바다에 닻을 내린 이양선 선장에게 상호 살해하는 일은 없기를 바라는 마음 및 조선의 중요한 요새지역에 갑자기 들어오기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면서 연해의 관리들과 무관들에게 절대로 서양배와 사단을 일으켜 사이가 나빠지게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신미양요 때 벌어졌던 일에 대해 괴이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까지 하는 반면에 조선은 외국과 관계를 가지지 않는 것은 500년 동안 지켜온 법이었으며, 청나라 황제도 옛 법을 파괴할 수는 없다는 말을 할 때 결국 조선 문호개방 문제는 청국의 전략 문제에 달려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대원군은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프랑스에 접근을 시도하였으나 불청관계가 나빠짐과 청국 내 선교사들의 활동으로 인해 청국의 방어망에 구멍이 ?린점등 여러 요소를 고려해 1866년(양인양요)도에 천주교 박해를 명령한 것은 불가피한 조치였다.

조선의 국내외 균형을 잡기 위한 방안을 모색한 태도에 있어 대원군과 고종이 비슷하나 고종은 정권이 어느 정도 확고 하게 되었을 때 청국의 종주권에 대한 주장을 거절하는 과정중에 문호개방에 대한 자기 입장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 나라의 풍습이 본래부터 이러하므로 세계의 웃음거리로 된다. 비록 서양 나라들로 말하더라도 본래 서로 은혜를 입은 일도 원한을 품은 일도 없었는데 애초에 우리 나라의 간사한 무리들이 그들을 끌어들임으로써 강화도와 평양의 분쟁을 일으켰으니 이는 우리 나라가 스스로 반성해야 할 바이다'. 이 같은 태도는 결국 조미수호조약에 (1882년5월22일)이어 조영수호조약(1882년6월6일), 그리고 조독수호조약 (같은 해 6월30일)을 맺게 한다. 청불 전쟁 때문에 조불 수호조약의 조인(1886년6월4일)이 늦어 졌다. 다시 말해 1866년의 강화도 약탈 이후 20년, 프랑스와 조선이 정상적인 우호관계를 가지게 죄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대원군세력과 청국 및 일본의 끝없는 간섭과 음모 때문에 프랑스는 1896년까지 조선 국왕의 기대에 미치지 못 했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하면서, 소위 말하는 아관파천 덕분에 일본 외무부의 조선책략을 파괴시켰다. 1901년에 운남신디케이트와 비밀리 계약을 조인한 대한제국의 정부는 프랑스로부터 차관과 경의선 부설권 및 평안도 광업 채굴권을 협상한 결과 러시아의 보호하에서 압록강 일대와 서한만의 경제를 발전 시킬 준비를 한다. 영일동맹의 압력이 가해짐으로 모든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돌아가고 더 이상 대한제국의 독립을 구실로 열강대국 사이에서 영향권을 위 한 투쟁을 할 필요성이 없어지자 일본은 대한제국의 내각을 구성하여 대한황제의 황권을 무시한 채 보호조약을 조인할 수 있었다.

영일동맹은 영향권의 문제로 프랑스와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가다가 프랑스는 대한제국에서 물러 서게 되었다. 한 세기 후인 오늘 날에 이르러 한불협력으로 한국의 철도망이 많은 발전을 보여주고 있는 것과 최근에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지난 3월에 평양 주재 중국 대사에게 압록강 하구 비단섬, 다시 말해서 서한만을 금융특구로 만들겠다는 구상을 직접 밝히는 것으로 보아 21세기엔 한불 경제협력은 보다 밝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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